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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영화 《La Cecilia》가 보여준 자유 공동체의 역설

by 모니리자 2025. 4. 2.

La Cecilia
AI 생성 이미지입니다

개요

1975년 장 루이 코몰리(Jean-Louis Comolli) 감독이 연출한 **《La Cecilia》**는 실존했던 아나키스트 공동체 실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정치 드라마로,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들이 브라질에 설립한 자유 공동체 ‘라 체칠리아(La Cecilia)’의 이상과 몰락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 재현을 넘어서, 이상주의가 실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마주치고 충돌하는지를 극적으로 탐구한다.

중심 인물인 로씨(Rossi)는 황제로부터 브라질 남부의 한 지역에 자치적인 실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여러 동료들과 함께 이주해 유토피아 건설에 나선다. 그러나 초기의 낙관과 희망은 점차 현실적인 문제, 내부 갈등, 그리고 외부 정치 상황과 맞물리며 이상은 점차 무너져간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유, 조직, 노동, 가족, 사랑, 재산, 권위, 무정부주의의 철학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서로 대립하며 균열되는지를 날카롭게 조명한다.

《La Cecilia》는 서사적 구조보다 인물들의 담론과 행동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실험적 구성을 지니며, 현실과 이념 사이의 틈을 파고든다. 철학적 논쟁과 시적인 연설이 빈번히 등장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심리적 변화는 은유적 이미지와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또한 남미 이민 역사, 식민주의적 배경, 유럽 혁명운동의 연속성 등을 배경으로 하여, 정치적 유토피아가 어떻게 개인의 욕망과 현실의 벽 앞에서 해체되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무엇보다도 《La Cecilia》는 이념과 실천의 괴리를 통해 관객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자유는 가능한가?”, “조직 없는 공동체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 “사랑과 가족은 사회주의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영화는 이상을 향한 열망이 어떻게 무너지며, 또 그 폐허 속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인간의 집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보여준다.

줄거리

영화 **《La Cecilia》**는 1890년대 실존했던 이상주의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다.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로씨(Rossi)는 브라질 황제로부터 한 땅을 양도받아, 그곳에 계급도, 권위도, 사적 재산도 없는 완전한 자유 공동체를 실험하려 한다. 그는 이탈리아의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며, **노동과 평등, 자유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공동체 ‘라 체칠리아(La Cecilia)’**를 세운다. 초기의 라 체칠리아는 희망과 낙관으로 가득 차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스스로의 노동으로 삶을 꾸리고, 가족이 아닌 공동체 중심의 유대 속에서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토지 소유 문제, 노동 분배의 불균형, 가족 중심적 사고방식, 성 역할 갈등, 그리고 자유 연애와 공동 육아에 대한 충돌이 공동체를 흔들기 시작한다. 각자의 사적 욕망은 집단의 이상과 충돌하고, 일부 구성원은 낡은 질서로 회귀하거나 공동체를 떠난다. 결국 브라질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공화국 정부는 황제가 부여한 토지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라 체칠리아에 재산세를 부과한다. 이에 따라 구성원들은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외부 정치적 압력까지 직면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가속화시킨다. 몇몇은 이상을 고수하고자 애쓰지만, 다수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떠나고, 남은 자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말로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다. 그러나 관객은 그들 스스로도 무정부주의적 실험의 한계를 체감했음을 감지하게 된다. 영화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한 공동체의 탄생과 해체를 통해 유토피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챕터1

새로운 땅, 새로운 이상

브라질 황제는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로씨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넨다. 황제는 젊고 개척이 덜 된 브라질 땅에 진보적인 사상을 실현하고자 하며, 로씨에게 땅을 주고 자유롭게 실험해 보라고 제안한다. 로씨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동지들과 함께 이상을 구현할 땅 ‘라 체칠리아’로 떠난다. 그들에게 이곳은 단순한 이민지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억압, 소유와 위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무대다. 이주자들은 낡은 질서를 부정하며 스스로의 손으로 공동체를 세우고자 한다. 그들은 가족보다 사상을 우선시하고, 개인보다 공동의 노동을 강조한다. 도착 초기의 분위기는 마치 혁명 직후의 순간처럼 열정과 연대, 해방감으로 충만하다.

공동체는 자유와 평등, 연대의 이상을 구현하려 노력한다. 남녀노소가 함께 논의를 통해 결정하고, 누구도 소유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로씨는 "땅은 일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이상을 강조하고, 사유재산 대신 공유재산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지향한다. 학교와 공동주방, 회의체계가 자발적으로 조직되며, 노동은 교대로 분배된다. 구성원들은 자유로운 연애와 공동 육아, 그리고 **가족의 해체를 통한 ‘보편적 인간 관계’**를 시도한다. 아이들은 모두의 아이이며, 여성 또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러한 실험은 당대 유럽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던 급진적인 자유 실현의 시도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 농업 경험의 부족, 자원 부족,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의 사상 차이는 점차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소한 말다툼이나 불만이었지만, 이는 곧 갈등의 씨앗이 된다. 노동의 양에 대한 불평등, 소유 개념의 모호함,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제도의 해체를 둘러싼 감정적 충돌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시험하게 된다. 라 체칠리아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들 안에서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고, 이 새로운 세상은 단순히 이념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음을 암시하기 시작한다.

챕터2

자유와 조직의 경계

시간이 흐르면서, 라 체칠리아 공동체의 이상은 점차 현실과 충돌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자유롭고 평등하게 보이던 공동체가 점차 효율성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조직’을 요구하게 되자,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이 촉발된다. 무정부주의적 자유를 중시하는 구성원들은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성"을 외치며 어떠한 형식의 규율이나 책임에도 저항한다. 반면, 농업과 공동체 운영을 위해 일정 수준의 조직화와 책임 분담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를 ‘협력의 진화’로 간주한다. 이 두 입장은 어느 누구의 악의도 아닌 철학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현실적인 운영 방식과 깊은 충돌을 낳는다.

가장 큰 갈등 중 하나는 노동의 배분과 그에 대한 보상에 있다. 어떤 이들은 땀 흘려 논을 갈고 곡식을 심는 반면, 어떤 이들은 교육이나 연설, 이상적 토론에만 몰두하며 실질적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땅은 일하는 자의 것”이라는 이상이 실제로 적용되면서,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목소리가 생겨나고, 이로 인해 공동체 내부의 신뢰가 흔들린다. 더욱이, 브라질 공화국이 황제의 토지 증여를 무효화하고, 땅의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 다시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요구는 공동체의 이념을 뿌리부터 흔든다. 이상과 현실의 타협, 혹은 배신이냐를 두고 분열이 더욱 심화된다. 일부는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공사장 노동에 참여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이를 체제에 굴복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반발한다.

또 다른 중심 갈등은 가족과 사랑, 성 역할의 문제다. 자유 연애와 공동 육아를 이상으로 내세운 공동체는 실제 관계 속에서 복잡한 감정적 파열을 겪는다. 누군가는 연인을 잃고, 누군가는 아이를 빼앗긴다. “가족은 자본주의의 근간”이라며 해체를 주장하던 구성원들도 사랑 앞에서 소유욕과 질투심에 휩싸인다. 특히 여성 구성원들은 남성 중심적 무정부주의의 이중성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진정한 해방은 경제적 자립과 윤리적 전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적 선언조차도 공동체 내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감정과 사상, 이념과 실천 사이의 틈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챕터3

이상과 붕괴의 순간

공동체의 이상은 외부의 정치적 변화와 내부의 감정적 균열에 의해 점차 무너져간다. 브라질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황제가 약속한 토지의 무상 사용 권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새로운 정부는 땅을 원래대로 ‘재매입’하라 요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공동체는 작물 수익금을 국가에 넘기고 일부 구성원은 정부의 공사 노동자로 파견된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구성원들은 분열된다. 어떤 이는 이를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지만, 또 다른 이는 이를 체제에 대한 굴복이라며 격렬히 반대한다. 공동체 내부의 회의는 반복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갈등은 회복 불가능한 균열로 변모하고, 서로를 ‘배신자’ 혹은 ‘비현실주의자’라 비난하며 공동체는 정서적 해체의 기로에 선다.

가장 결정적인 분열은 바로 가족 중심 가치관과 공동체 중심 가치관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일부 가족 단위의 구성원은 자녀 교육과 생계 문제로 인해 공동체의 이상보다 안정적인 삶을 선택하게 되고, 스스로 공동체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몫이라 여기는 곡식과 도구를 챙겨 나가고, 남은 자들은 이를 ‘도둑질’이라 분노한다. 이 과정에서 격렬한 감정의 폭발과 말다툼, 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지지만, 결국 공동체는 이들을 붙잡지 않는다. 떠나는 이들과 남는 이들 모두가 스스로의 결정에 고통스러워하며, 이로써 ‘공동체’는 실질적으로 해체된다. 남은 자들은 타협하지 못한 이상과 상처를 안고, 불타버린 집기를 다시 주워 모으며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을 되풀이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허무와 패배의 정서가 깔려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진 현실 앞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돌아본다. 어떤 이들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어떤 이는 **“혁명은 혁명의 중심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자각은 곧 이 이상주의적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을 자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그 실패 속에서 ‘진정한 이상이란 무엇인가’, ‘조직 없는 자유란 가능한가’라는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들이 연극 ‘당통의 죽음’을 연기하는 장면을 통해, 라 체칠리아가 단순한 실패가 아닌 역사의 일부였으며, 이상을 연기하는 사람들 안에 그것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현실은 이들을 무너뜨렸지만, 이상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총평

영화 **《La Cecilia》**는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이념이 현실에 닿았을 때 어떤 균열과 파열음을 만들어내는지를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보여주는 정치적 인간 드라마이자 철학적 시뮬레이션 실험이다. 장 루이 코몰리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정부주의, 자유 공동체, 평등과 조직, 사랑과 소유라는 복잡한 주제들을 이론이 아닌 삶의 현장 속에서 드러나도록 연출한다. 이 영화는 ‘실험’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영화이며, 이상주의의 본질과 그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함을 통찰한다.

《La Cecilia》의 가장 큰 미덕은 어느 하나의 입장에 편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무정부주의자의 이상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지도, 냉소적으로 조롱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이 실험의 모든 층위를 담담하게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판단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실제 공동체 생활을 따라가듯 구성된 영화의 리듬, 인물들의 연설처럼 들리는 대사들, 반복되는 회의와 갈등 구조는 한 편의 서사라기보다는 사회 실험을 담은 관찰 기록물에 가깝다. 이를 통해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가 현실의 이상과 실패를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지 19세기 말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자유와 질서, 개인과 공동체, 권위와 해방, 사랑과 소유 사이의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La Cecilia》는 이러한 보편적 갈등을 역사 속의 작은 공동체를 통해 극대화시키며,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가장 고결한 이상조차 뒤흔들 수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특히 여성 해방, 공동육아, 자유 연애와 같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며, 2020년대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던진다. 영화의 마지막,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실패를 딛고도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근원적 의지를 의미한다.

결국 《La Cecilia》는 실패한 공동체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이상주의의 고뇌와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적 딜레마에 대한 깊은 이해는 오히려 이 영화를 고전으로 만들었다. 이는 단지 한 실험의 종말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할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대한 은유이며, 그 간극에서 피어나는 진짜 혁명의 씨앗에 대한 성찰이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그 자유를 유지한 채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가?
《La Cecilia》는 이 오래된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던지고 있다.